내가 갓 스물네 살이었던 그 무렵엔 조선호텔 정문 바로 길 건너편에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 지하실에 프린스(Prince)라는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은 당시 내가 자주 드나들던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 나는 그 다방에서 어떤 잡지사 기자를 만나, 청탁받은 원고를 넘겨주기로 했었다.
당시 나는 “해가 지지 않는 땅”이란 나의 소설이 TBC 라디오 방송국에서 연속 낭독되고 있었으므로, 그 일로 중앙일보사 위에 있는 TBC 방송국 건물을 자주 드나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도 아마 방송국에 들려 볼일을 끝내고 그 다방으로 갔었을 것이라고, 지금 막연히 추측하고 있다. 그곳에 가서 잡지사 기자에게 원고를 건네주고 그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인데, 우연히 내 시야에 옆자리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앞에 두 여자를 앉혀놓고, 상당히 즐거워하는 얼굴로 무슨 얘기를 하고는 중이었다. 처음엔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에 문득 힘이 주어졌는데, 순간 벌떡 일어나 그의 앞으로 나아가 다짜고짜 그에게 저쪽 구석 자리로 좀 가자고 청했다. 참으로 비상식적이고 저돌적인 나의 행동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순순히 내가 청하는대로 저쪽 구석진 자리로 나를 따라왔다.
나는 의자에 앉고 그는 서 있는 자세에서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 혹시 대전에서 피난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으셨어요? - 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대뜸, 그 당시 우리 반 반장이던 송근호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더니 뒤이어 박근권, 이성숙, 박민원 등의 이름이 줄지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모두가 내 기억에 남아있는, 당시 공부 잘하던 남자애들의 이름이라 – 아, 맞아요, 맞아요, -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는, - 나, 박숙자예요, 기억나세요? 기억나세요? - 라고 외치며, 그의 기억 안에서 나의 존재를 끌어내 보려고 애처롭게 안간힘을 썼다. 박숙자는 어릴 적 내 이름이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서 있는 채로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 아,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이빨로 손톱을 뜯으며, 나를 바라보던, 그 여자애 맞지? - 라고 대답했는데, 그가 기억해낸 소녀가 바로 나였는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다. 그이도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소녀가 바로 나였다라고 확실하게 믿지 못하던 눈치였다. 그러나 그때 내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건 맞고, 또 손톱을 이빨로 뜯으며 사람들을 바라보던 버릇이 있었던 듯도 하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내가 특별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엔 당시 나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던 소녀였었다.
전혀 이쁘지도 않았고 공부도 지지리 못했었다. 6.25 사변이 나던 해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던 동안, 그나마 배웠던 한글도 다 까먹어서 바둑이란 글자조차도 제대로 못 쓰고 바두기라고 써서 웃음거리가 되고 야단도 맞곤 하던 일이 떠 오른다. 그렇다고 나이 먹은 애를 저학년에 둘 수도 없다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나를 제 나이에 맞게 5학년에 월반(越班)시켜 집어넣어 놓았으니 공부를 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는 나와는 달리 공부도 잘해서 우수한 남자애들 속에 끼어있었고, 여자애들이 노는 곳에 와서 고무줄을 끊어놓곤 하던 다른 남자애들처럼 짓궂지도 않았다. 여자애들이 노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던 점잖고, 외모도 반듯하고 행동거지도 단정한 소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에게 그 나이의 소녀로서도 품을 수 있는 특별한 감정 같은 게 내 안에 있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한동네에 살던 같은 반 남자애와 휘영청 밝은 달밤에 기와공장 마당에서 술래잡기하던 일이 더욱 깊이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서울 올라와서 청파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반에 있었던, 옥동자처럼 잘 생겼던 소년에 대해 내가 품고 있었던 그런 뚜렷한 연모의 정 같은 건 그 시절의 그에 대한 나의 감정 안엔 없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릴 때 본 그의 얼굴을 10년이 훌쩍 넘은 뒤, 완전히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는 상태에서 내가 당장에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그의 모습이 안 변해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성장기의 십수년의 세월이라는 게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흐르는 게 아닌데, 초등학교 5학년 때 본 소년의 얼굴을 스물여섯 살이 된 청년의 얼굴에서 찾아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내가 당장 알아보았다는 게 두고두고 생각해도 신기하다. 나의 모습은 이미 옛날 그 새까맣고 꾀죄죄해 보이던 소녀의 모습에서 훌쩍 벗어나 누가 봐도 꽤 괜찮은 모습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노란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앉아있는 나의 자태가 삼삼했다라고 하는데, 삼삼하다라는 남자들의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가 구석자리로 가자는 나의 요청에 당장에 따라 온 것도 그의 눈에 내가 이미 들어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표현은 너무 과하고, 눈에 바로 띄는 곳에 자기 마음에 드는 꽤 이쁜 여자가 앉아있어서 시선이 끌리고 있었던 판인데, 그런 여자가 일어나 자기보고 잠깐 저쪽 구석 자리로 같이 가자고 하니, 전혀 주저할 겨를이 없이, 황급히 따라나선 것이었다. 서로를 알아보고는 우리는 곧 자기소개를 했는데, 내가 먼저, - 수도여중고를 나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는 애길 했고, 그러자 그도, 자기는 서울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공군에 입대하여 소위로 복무 중이라는 얘기를 했다.
서로의 신분을 털어놓아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 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들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첫눈에 바로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첫눈에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두고두고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동안 사랑의 작가라는 명칭을 달고 그렇게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를 써온 나이지만, 아직도 나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단번에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그 정체를 아직도 모른다.
어린 시절 피난민 초등학교에 같이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렇게 단번에 서로에게 끌렸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의 만남을 흔히 말하는 그 운명이란 범주 속에 넣어 보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던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날 내가 왜 하필 그 프린스라는 다방엘 갔었으며, 왜 그는 또 거기와 있었는지, 그것도 바로 내 옆좌석의 앞자리에 나와 마주 보이는 위치에, 처음엔 무심히 바라보다가 왜 내가 갑자기 그를 알아보게 되었는지 모두가 다 신비롭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나중에 그가 내게 한 말인데, 나와 구석 자리에 가서, 내 얼굴과 마주쳤을 때,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아, 나는 이 여자하고 평생 같이 살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나에겐 그런 운명에 대한 예감 같은 건 들지 않았지만, 그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서 잠들어 계신 엄마와 동생들을 모두 깨워놓고 나에게 드디어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떠들어 댔다. 그 소식을 듣고 제일 기뻐하신 것은 우리 엄마였다.
우리 딸이 드디어 시집을 가게 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며 기뻐했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는데 그 시절엔 그 나이가 결혼 만기(滿期)였다. 그 나이까지 딸에게 정해놓은 신랑감이 없었으니 저으기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었다. 후일 나의 남편이 된 김인호씨는 당장 그 다음날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렇게 하여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나에게 사랑의 환희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남자가 바로 그였다. 온종일 다방에 같이 앉아만 있어도 우리는 행복했었다. 꿀물 같은 행복감이 가슴 안에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신(神)께서 인간에게만 주셨다라고 하시는 그 지고한 사랑의 환희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맛보게 하여 주신 것에 대해, 나는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예수님과 영적으로 만났을 때, 느껴지던 그 지고한 감미와 환희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두 마음이 만나 서로 사랑할 때의 기쁨이다라고 나는 증언할 수 있다.
물론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과의 차이가 있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가장 천상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주는 기쁨이다라고 나는 말 할 수가 있다. 그를 만나게 해주시어, 그런 깊은 사랑의 유열감을 맛보게 해주신 분께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그의 곁에 앉아있을 때면 아주 좋은 은은한 향내가 맡아지곤 하였는데, 싱싱한 수목이 내뿜는 신선한 향취와 같은 것이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데, 지금까지도 그 진원지가 해명이 안 되는 채 남아있다. 당시 그는 하루에 한 갑씩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었는데, 전혀 담배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그 은은한 향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자건, 남자건, 그 어떤 인간에게서도 나는 아직까지 그의 곁에서 맡아지던, 그런 좋은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진실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영혼에서 그런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겐 서로를 만나기 전, 소위 사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더 큰 빛 앞에 작은 빛은 사라져야 하듯이 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고 떠나야만 되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나의 첫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를 만나기 전 내가 사귀었던 다른 남자들은 오히려 나의 고독과 기갈을 더해 주었던 대상들일 뿐이었다. 더 채워지지 못해, 덜 고독해지기 위해 나는 찾아 헤매었고, 그를 만나지 못했으면, 나의 그런 방황은 끝없이 계속되었을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결혼이란, 그때 나에겐 죽음 이상의 처형으로 느껴졌었다. 그가 나에게 와주지 않았으면, 나의 청춘은 황폐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에게 청춘이란 것도 아예 없었을 것이었다.
일 년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로 되어있듯이 우리 인생 안에도 그런 절기들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가 청춘기에만 이룰 수 있는 그 푸르른 사랑의 정서와 그 싱그러움 안으로 그는 나를 이끌어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었다. 그가 백령도 복무를 마치고 대방동 공군본부로 옮겨오고부터는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는데, 한번은 그가 퇴근 후 우리집 근방의 다방으로 오겠다, 라고 약속해 놓고는, 다른 아무런 연락도 없이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그에게 무슨 중대한 사고가 생겼다라고 판단한 나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온 집안을 뒤집어 놓았다. 심지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중 시아버지가 될 그의 아버지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난리를 쳐댔었다. 그런 나를 안위시키기 위해 엄마가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한번은 내가 그의 앞에서 사라져, 이번엔 그가 또 나 때문에 그렇게 소란을 피운 적도 있었다.
교직생활을 그만둔 아버지가 시흥 근처에 농장을 마련하고 그곳에서의 양계장을 꿈꾸며 우리식구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이사를 갔던 때였다. 이사를 간 뒤 나는 며칠 동안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리고 잠적한 모양새를 취하며 홀로 견디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에 대한 나의 과도한 열정이 나 스스로도 겁이 났었던 것일 수도 있고, 거기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일면 그에게 속박당하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사라진 날들을 그가 어떻게 견디는지, 보고자 했던 마음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이유로 그에게 연락을 끊은 채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며칠째 견디고 있었을 때였다. 명동에서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어 명동국립극장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문득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공군 장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인호씨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밖의 거리를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문득 눈에 띄자 그가 창밖의 그를 가르키며, 저 사람이 같은 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아무개라고 말해 주었던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버스 속에서 먼발치로 본 사람이었는데 내가 대번에 그렇게 그를 알아본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보자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얼른 그의 앞으로 달려가 – 조 중위님이시죠? - 라고 물었다. 그리고 – 저, 김인호씨의......라고, 입을 떼려는데 그는 내 소개는 더 듣지도 않고, 대뜸 – 박계형씨죠? - 라고, 나에게 황급하게 묻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그렇게 알아본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먼발치로라도 나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내가 그렇다, 라고 대답하자,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 지금 얼른 김 중위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그 친구 큰일 났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옷 벗고 나가서 당신 찾겠다고 야단났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얼굴 표정이 얼마나 급박해보이는지, 마치 곧 죽어가는 친구라도 보고 나온 듯했다. 진심으로 친구를 걱정해 주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던 낯빛이었는데, 그런 그의 표정이 생각날 때마다 나의 마음 안엔 그를 향한 따사한 물결이 파동쳐 간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던 그가 제발 선하게 살며, 행복해 있어 주길 빈다.
이틑날 나의 연락을 받고, 그가 내가 이사한 시흥 시골 동네에 나타났다. 울퉁불퉁한, 포장 안 된 흙길 위를 덜덜거리며 달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와서 내가 서 있는 정거장에서 내렸는데 정거장에 서 있는 나를 보자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마침 석양이 지고 있던 황혼 무렵이었는데 석양에 반짝이던 그의 두 눈의 눈물을 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일평생 그 어떤 사랑의 고백보다도 석양을 받아 번쩍이던 그의 두 눈에 고여있던 그 눈물이 나의 가슴엔 더욱더 사무쳐오던 곳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해서, 그렇다고,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섬겨야 할 분을 결코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첫눈에 내가 그에게 반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몽땅 그에게 다 던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그에게 먼저 제안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가 만일 나의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었을 것이었다.
나의 제안이란 간단했다.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이신 신(神)의 존재를 그가 반드시 인정하고, 믿어야만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가 만일 나의 이 조건을 거부한다면, 나는 그와 동행할 수 없다라고 나는 분명히 말했었다. 부산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평양에 가려고 하는 사람과, 어떻게 같은 차를 타고 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는데, 그는 나의 제안을 두 말 없이 즉각 받아들였다. 오히려 반기는 태도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나를 만나기 전 이미 그에겐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있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나의 인생 안에서 가장 기뻤었던 날이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나의 결혼식이었다라고 대답해 오고 있다. 가곡 ‘가고파’의 작사자의 시인 이은상 씨 주례로 신문회관에서 거행되었던 나의 결혼식에서,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 신부가 다소곳하지 못하고, 그렇게 방긋방긋 웃으면 어떡하느냐, 라고 핀잔을 주는 이까지도 있었다.
사랑하는 그와 함께 살게 된다는 일이 나에겐 너무나 기쁘게 느껴졌었다. 양가 중 아무도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가 없었고, 특히 우리 친정아버지가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 그 일이 나에겐 매우 중요했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아버지를 몹시 사랑했었고 나의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 드리는 일이 나의 큰 소망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결혼 안에 많은 축복을 주셨는데, 당시엔 잘 모르다가, 지나서, 뒤돌아보니 우리들의 인생 안에 부어주신 그 많은 은혜들이 더 잘 보인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남자를 보내주시어, 함께 주님을 섬기며, 평생을 정숙한 아내로 살게 해 주신 은혜에 가장 감사드린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를 세상에서, 우뚝 세우시고, 많은 직함들을 주시어, 영예롭게 하여 주셨고, 그의 곁자리에 나를 앉혀주시어, 풍요와 존경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셨다. 죄많 고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에게 너무나 분수 넘친 대우를 받으며 살게 하여 주셨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그의 머리 위엔 눈발이 덮히고 그 아름답던 그의 모습은 많이 쇠퇴해져서, 엣날에 보던 그 보기 좋던 모습이 지금은 거의 아니다.
한양대 교수로 그가 처음 부임해 갔을 때엔 영화배우가 온 것 같다라고 까지, 그곳에서 수근거렸다고하는데, 오랜 만에 명동에서 만난 제자 하나가 그를 보고, - 아니 교수님이 왜 이렇게 되셨습니까? - 라고 거듭 거듭 외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 보고, 땅을 내려다 보며, 계속 한숨을 내쉴만큼 지금은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젊은 날의 그를 보았던 고 이민자 시인도 살아생전 우리 집에 와서 근래의 그를 보고는 - 얘, 너의 남편 옛날엔 캉카(King Card)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어쩌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니? - 라고 하던 소리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의 변한 모습에 놀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예전 젊었을 때 그의 곁에 앉아있으면, 맡아지던 그 은은한 숲내음 같은 것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라져 다시 맡을 수 없게 되었고, 석양에 번쩍이던, 그의 두눈에 고여 있었던 그 눈물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의 모습이 변하든 말든 내 사랑엔 변함이 없다. 비록 나의 눈으로는 그의 아름답던 모습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여도 나의 마음 안에 찍혀있는 그의 보기 좋던 모습들은 그대로 살아 있다.
곤색 공군 트랜치코트가 썩 잘 어울리던 그의 멋진 몸매이며, 장교모자 밑에서 빛나던 눈동자, 희고 맑은 피부, 눈이 쏟아지는 심야의 밤거리를 함께 걸었던 일을 포함해 그와 함께 했던 그 수많은 장면들이 모두 다 내 마음 안에 찍혀져서 사라지지 않는다. 연애 때의 그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중년 무렵의 그의 보기 좋던 모습들도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특히 약간 거들거리며 걷던, 그 힘차던 걸음걸이 같은 것 말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그의 모습만 볼 수 있지만, 나는 나의 추억들 속에 등장하는 그의 모든 아름답던 모습들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힘써 일하던 모습들도 나에게 지울 수 없는 곳들이다. 그는 평생 참으로 열심히 일해왔다. 그 결과인 소득을 그는 다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것도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대목이고 세상의 수많은 여자들 중에 나를 그의 유일한 여자로 선택해 항상 그의 곁에 앉혀주었다라는 사실도 크게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나와 함께 ⸢하느님⸥을 섬겨 온 것이 제일 나에겐 감사한 일이다. 만일 그가 애초에 나와의 약속을 배반하고 다른 길로 나갔다면, 그와의 만남은 축복이 아니고 저주의 건으로 기록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 현재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그가 나를 남겨둔 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다. 그와 함께 수십년을 살아오면서도 잊고 살아왔던 일이 요즈음 갑자기 내 안에 부상되어 오고 있다.
근래 자주 그가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내게 찾아오기 시작한 증상인데, 무감각하게 숫자로만 맞아오던 팔십이 넘은 우리 나이도 제 의미를 내 안에 전달시켜주고 있다. 우리 친정어머니가 별세한 나이가 갓 77살이고,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나이가 78세이다. 그 나이도 그땐 장수한 나이로 치고, 여한(餘恨)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 나이는 그보다도 훨씬 위니, 이만저만 오래 산 나이가 아니다.
조만간 우리도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다 맞이해야 하는 그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 해야할 것이 라는 생각이 갑자기 투구처럼 나의 머리 위에 씌워지는 것이다. 바로 몇해 전 그가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사경을 헤메는 바람에 갑자기 우리 가운데 죽음이란 문제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아들과 장례식장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까지 했고, 담당의사가 나를 병실 밖으로 불러내어 아무리 항생제를 계속 투여하고 있어도 핏속의 박테리아가 번식을 계속하고 있고, 혈압이 자꾸 떨어지고 있는 상태이니, 도저히 가망이 없다 라는 사인을 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까지 하였었다.
멀리 두고있던 우리들의 이별이 갑작스레 나에게 들이닥친 것이었다. 나에겐 전혀 예비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우리들의 결혼에 이런 이별의 운명이 묻혀있다라는 사실을 내가 진즉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우리들 앞에 닥친 죽음이라는 이별이 나에겐 큰 난관(難關)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흔히 - 결혼 주례사에 사용되는 –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잘 살라는 말은 부족한 소리였다. 결혼은 단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만 잘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된 이후에도 영원까지 함께 가야 하는 사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 결혼으로 맺어지는 부부관계인 것이다.이렇게 결혼 안에 죽음이란 이별이 묻혀있고, 죽음의 이별이 결혼의 끝이라면, 결혼이란 너무나도 잔인하고 비참한 제도인 것이다.
부모하고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한몸이 되어 살아오고, 서로 사랑하므로서 두 심장이 하나로 붙어버린 관계인데, 어찌 둘 사이를 찢어버린단 말인가, 그것이 결혼의 끝이라면, 너무나 잔인하고 비참한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들의 결혼 안에 그런 영원힌 이별을 두시지 않으셨다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당시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시고, 그를 다시 살려주시어 그이와 나는 지금 또다시 함께 살고 있다. 비록 언젠가 주님께서 그를 먼저 데려가신다, 하여도, 나는 크게 슬퍼하지 않으리.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고, 잠시의 이별을 기쁘게 참으리라. 먼저 떠나간 나의 맏아들도 하늘에 살아있고, 77살, 78살 한해 사이를 두고 나란히 떠나간 나의 친정 부모님도 하늘에 살아 계신걸, 하느님께서 알려주시어서 이미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날 것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이가 비록 나보다 먼저 떠난다 하여, 그토록 놀라고 슬퍼하려 한단 말인가.
잠시 먼 외국으로 출장을 간 남편을 그리워하듯, 그렇게 잠시 그리워하다가 곧 다시 만나게 될 일일 텐데. 지난 생애동안 내가 줄기차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었다지만, 이렇게나 우리들 인생 안에 묻혀 있는 죽음의 운명을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또 내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살아 계시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일인가를 이토록이나 참되게 깨달아 보기도 처음이다.
우리는 죽지만 다시 살고, 헤어지지만 다시 만나 영원한 행복 속에서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그분께 어느 때 보다 열렬한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진심의 감사를 드린다. 사람이 죽으면 개나 소나 돼지와 같은 짐승이 되어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 라고 가르치는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 그 이별의 아픔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지를 나는 잘 모른다.
이제 다시는 그 사랑하는 이들을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 그 혹독한 이별의 절망과 고통을 어떻게 참아내고 있는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만 자신과 닮은 불멸의 영혼(靈魂)을 주셨고, 짐승들에겐 각혼(覺魂)이라는 것을 주셨는데, 짐승의 각혼은 인간의 영혼처럼 불멸하지 않고, 짐승의 몸이 죽을 때 동시에 소멸한다라고 알려 주셨다.
인간의 영혼과 짐승의 각혼이 이토록 다른데, 어떻게 인간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도 가시어 그들뿐만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앞둔 모든 절망자들에게 가시어, 그들의 길이 되어 주시고, 영원한 이별의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건져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필자 약력
-1943년 서울 출생
-1965년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1963년 동양방송(TBC) 개국기념 현상소설 당선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19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
-현재까지 ‘자유를 향해 나는 새’, ‘정이 가는 발자욱 소리’ 등 40여 종의 소설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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