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뒤셴-
『히든 피겨스』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춰진 인물들 “이다. 호기심이란 본디 즐거운 감정이라 이것이 충족되기를 누구나 기대하기 때문에, 『히든 피겨스』같이 감춰진 인물이 차별과 역경을 딛고 점점 드러나는 내용의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히든 피겨스』는 그래서 재미있고 유쾌하다. 흑인 여성이 받는 차별의 에피소드들이 잔인하고 역겨운 것이 아니라 코믹해 보이는 것은 차별이 성공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감하며 보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의학사에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 페니실린을 시작으로 스트렙토마이신, 에리스로마이신, 클로람페니콜, 반코마이신 등의 항생제가 집중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이 약품들은 인류를 감염병으로부터 구원하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을 구하고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했다.
항생제 발견 이전에는 장미가시에 찔려 사망한 시인 릴케처럼 사소한 상처에도 세균감염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약물의 개발은 개발자에게는 노벨상 같은 대대로 전해질 명예를, 그리고 제약사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약품 발견과 개발에 기여했음에도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히든 피겨스들이 여러 명 존재한다.

영국의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1881년 8월 6일~1955년 3월 11일)이 1928년 9월 28일 오랜 휴가를 마치고 자신의 연구실에 돌아와, 실수로 뚜껑을 덮지 않은 포도상구균 배양용기를 들여다보고 거기에 자란 푸른곰팡이 주변에 포도상구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은 그에게 주어진 인류를 세균으로부터 구원하라는 운명 같은 우연이었다.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죽이는 푸른곰팡이에서 나오는 물질을 보았고 그것을 푸른곰팡이 학명 Penicillium notatum을 따서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푸른곰팡이에서 분리해 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실패하였다. 그의 우연한 발견 후 10년이 지나서 옥스퍼드 대학의 플로리와 체인 연구팀이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분리해 냈다.
그러나 푸른곰팡이가 워낙 양이 적어서 겨우 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정도만 만들 수 있었다. 그것으로 감염된 환자에게 실험을 하였는데 환자는 좋아지다가 양이 모자라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여 연구실의 폭격을 걱정했던 플로리와 체인은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전폭적으로 후원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모든 자료를 갖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페니실린을 대량생산 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워 알약 형태로 만들어 시판하였다. 세균에 감염된 수많은 환자들이 페니실린 알약을 먹고 목숨을 건졌다. 1945년에 플레밍, 플로리, 체인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의 살균 작용을 발견하기 한참 전인 19세기 후반에 이를 먼저 발견하고 연구하던 의사가 있었다. 그가 에르네스트 뒤셴이라는 프랑스 의사다. 그는 1874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897년에 리옹의 군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 군의관이 되어 복무를 하였다. 1901년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내는 결핵에 걸려 2년 만에 사망하였고, 그도 결핵에 걸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1912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가 의대를 졸업하면서 제출한 학위논문은 곰팡이와 미생물 사이의 길항 작용에 관한 것이었다.
곰팡이가 항균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감염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장티푸스균, 대장균이 있는 배지에 푸른곰팡이 배양액을 첨가하는 실험을 하였다. 푸른곰팡이가 배지의 세균을 없애버렸다. 대장균과 장티푸스균을 기니피그에 접종했을 때는 기니피그가 죽었지만, 푸른곰팡이를 섞은 대장균과 장티푸스균의 배지에 있는 액상을 접종을 했을 때는 죽지 않고 살았다. 그는 논문에서 푸른곰팡이가 장티푸스균과 대장균을 사멸시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그만둘 수 없었다. 자신의 연구가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며, 인류에 크게 기여할 것임을 직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추가 연구를 위한 지원을 받고자 프랑스 최고 연구소인 파스퇴르 연구소에 자신의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파스퇴르 연구소는 그의 논문을 접수조차 받지 않았다. 그가 무명인 데다가 23살 어린 학생의 신분이었기에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의 논문이 받아졌다면 어땠을까? 그가 일찍 죽지도 않았을 것이며 노벨상의 영광도 안지 않았을까? 프랑스는 항생제 발명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추가연구도하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살다가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오래 동안 잊히고 말았다.
그의 이름이 되살아 난 것은 프랑스 보건부장관을 역임했던 법조인 출신 정치인 쥐스탱 고다르(1871년 11월 26일 ~ 1956년 12월 13일)에 의해서였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인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고, 한국친우회 부의장을 했다. 그는 뒤셴을 “페니실린”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 항생제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였다.
뒤셴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1974년에는 모나코에서 푸른곰팡이와 뒤셴의 모습을 나란히 넣은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1999년 『랜싯』에 실린 한 논문(Duckett, 1999)에는 뒤셴을 “항생제의 아버지”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칭송은 사후약방문일 뿐이다. 에르네스트 뒤셴은 항생제 발견에 있어서 불행한 히든 피겨라 하겠다.
칼럼니스트 소개

오순영 원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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