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히든 피겨스』는 2016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로 1960년대 소련과의 우주패권 다툼에서 미국이 승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NASA의 흑인 여성 전산원의 활약상을 그렸다. 주인공인 캐서린 존스는 실존 인물인데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화장실도 가까운 곳을 놔두고 800m 떨어진 유색인 전용 화장실을 다녀야 했으며, 공용 커피도 마시지 못하고 별도의 유색인 전용 포트에서 마셔야 하는 차별을 받았다. 수학 천재인 그녀는 지구 궤도를 선회하는 탐사선의 지구 착륙지점을 정확히 계산하여 무사히 귀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영화 개봉 이듬해인 2017년에는 NASA의 랭리 연구소에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캐더린 존스 전산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의학 분야에도 이런 히든 피겨스가 여러 명이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헨리에타 렉스’는 의사도 아니고, 자궁경부암으로 일찍 세상을 마감한 불행한 흑인 여성이지만 현대의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맨 처음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1920년 미국의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첫 아이를 낳았다. 여섯 번째 임신을 한 줄 알고 병원을 찾았다가, 자궁경부암인 것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흑인 여성이 암을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은 존스 홉킨스 병원이 유일하였다. 그곳의 저명한 부인과 의사인 하워드 존스박사가 그녀를 진찰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최신의 치료법이자 최고가의 치료법이라 할 수 있는 라듐 방사선 치료를 하였으나 전이를 막지 못하여 진단 후 8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자궁경부암 조직은 조지 가이 박사의 연구실로 보내졌다. 조지 가이 박사는 병리학자로 각종 세포를 수집하여 연구하던 중이었는데, 다른 세포는 몇 시간 혹은 수일 내 생명력을 잃었지만, 헨리에타의 자궁경부암세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20-24시간 만에 두 배로 증식하였다. 그는 이 세포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HeLa 세포라 명명하였다. 의료윤리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HeLa 세포는 무상으로 여러 연구소에 공여되었다.
HeLa 세포는 불로불사의 세포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무한대로 증식하여 2009년까지 5천만 톤이 생산되었다. 정상 인간 세포는 DNA 이중 나선 끝에 DNA를 보호하는 텔로미어가 있다. 그런데 세포가 증식을 하면 할수록 돌연변이가 많아져 불량세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가 짧아져 결국에는 ‘세포자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HeLa세포에는 텔로미어가 짧아지지 않도록 복구하는 텔로미어라제가 있어 분열을 계속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그동안의 상식은 HeLa 세포로 깨졌다. 살아있는 것이라도 죽지 않을 수 있으며, 끝없이 증식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상식이다. 지중해에서 발견된 붉은 해파리는 영문명이 immortal jellyfish인데 글자 그대로 죽지 않는 해파리이다. 이 해파리는 수명이 다할 때쯤이면 번데기처럼 변했다가 그 속에서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 새끼로 재탄생한다.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면, 가혹한 환경만 아니면 영원히 살 수 있다. 아프리카의 땅 속에 사는 벌거숭이두더지는 같은 크기의 쥐보다 10배 이상 오래 사는데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늙으면 사망률이 올라가는 ‘곰퍼츠의 사망률 법칙’을 따른다. 이 법칙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30세 이후부터 8년마다 사망률이 두 배가 올라간다. 벌거숭이두더지는 특이하게 이 법칙을 따르지 않으며 생식이 가능한 나이가 지나도 하루 사망률이 1만 분의 1로 이하로 꾸준히 유지된다고 한다.

불멸의 HeLa세포는 현대의학에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조너선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바이러스를 HeLa세포에 감염시키는 실험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다. 소아마비는 5,60년대에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불구로 만들었던 무서운 전염병이었지만, 현재는 천연두처럼 완전한 종식이 예견되는 전염병이 되었다. 최초의 복제세포 개발, 체외수정(시험관아기) 시술법, 암 연구, 유전자 지도 연구, 독성검사, 방사능뿐 아니라 화장품, 접착제, 테이프 등의 공산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평가에 HeLa 세포가 사용되었다. HeLa 세포 관련 특허는 11,000건에 달하며 2009년까지 발표된 관련 논문만 6만 건, 매달 300건의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고 한다.
50여 년 전, 51살 이른 나이로 헬리에타는 사망 했지만, 그녀가 남긴 세포 HeLa는 불치·난치병, 세균·바이러스, 방사능 및 각종 독성물질과 인류의 전쟁에서 80억 인류를 대표해서 현재까지 싸우고 있으며, 인간 수명의 한계를 넘어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동안 히든 피겨스 영화처럼 그녀의 이름은 무시되었고, 차별받았으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2013년 3월 11일 HeLa 세포의 유전체 서열이 완전히 밝혀지면서 헨리에타 랙스의 후손들에게 HeLa 세포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미국 국립보건원장 ‘프랜시스 콜린스’는 헨리에타의 가족 2명, 과학, 의학, 생명윤리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위원회를 구성토록 하여 HeLa 세포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헨리에타 랙스의 손자 알프레드 랙스 카터는 네이처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과학자들이 잘못된 방법을 썼지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2020년 8월에는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23년에는『헬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이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24년 10월에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 헨리에타 랙스 빌딩 기공식이 열렸다.
칼럼니스트 소개

오순영 원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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