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구멍 난 가슴을 봉합한 최초의 심장의 루드비히 렌 (Ludwig Rhen)
19세기말 마취와 소독이 정착되면서 거의 모든 장기에 대한 수술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심장만은 여전히 불가촉 영역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심장만 정성스럽게 방부 처리하여 항아리에 보존하였는데, 사는 동안 행했던 악행과 선행이 심장에 기록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고문서 『사자의 서』에는 사후세계의 여신 ‘마트’가 망자의 심장 무게를 재는데, 깃털보다 무거우면 살아생전 많은 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하여 심장을 괴물 암무트의 먹이로 던져버린다고 하였다. 고대의 만물박사 아리스토텔레스는 부화하는 알에서 심장이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것을 관찰하고는 심장이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라 하였다. 아무튼지 간에 고대부터 세기말까지 수천 년 동안 심장은 영혼과 마음이 있는 신성한 장소라 수술이 불가함은 누구나 인정하는 기정사실이었다.
루드비히 렌(1849~1930)은 독일 알렌슈타인에서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28살 때 작은 외과의원을 개업하여 의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대학병원 저명한 교수 밑에서 수련의로 몇 년을 보내지 않고, 술기 대부분을 독학으로 터득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모교의 외과 교수가 되었다.
그가 1896년 9월 프랑크푸르트 주립병원에서 근무할 때였다. 가슴을 칼에 찔린 22살의 청년이 실려 왔다. 이름이 빌헬름 야스투스라는 정원사였는데 부정맥 때문에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안 된 자였다. 술을 마시고 공원에서 걸어가다가 괴한으로부터 가슴에 칼이 찔렸다. 도착했을 때 그의 상의는 피에 젖어 있었으며 얼굴은 창백하였고, 호흡이 가쁘고 맥박이 겨우 잡힐 정도였다. 렌은 환자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심장까지 칼에 찔린 것이 확실하였다. 환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까지 모든 의사는 심장에 외상이 있는 환자는 죽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았지만, 그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즉시 마취를 시작하였고, 흉골의 좌측 경계와 네 번째 늑골사이로 메스를 넣어 14cm 절개를 하고 리트렉터(retractor, 절개부위를 넓게 벌리는 수술도구)로 벌려 심낭을 노출시켰다.
심장이 뛸 때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고, 선지같이 응고된 피가 심장에 고여 있었다. 피를 걷어내자 우심실에 1.5cm 크기의 벌어진 상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지혈겸자로 집어서 지혈을 시도했으나, 심낭이 쉽게 찢어져 버렸다. 손가락으로 눌러 지혈을 시도했지만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지혈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심장을 자세히 보니 수축할 때는 심장이 돌처럼 단단했고 시간이 짧았으나 이완할 때는 부드러워지고 시간이 길었다. 이완하는 타이밍에 봉합사 달린 바늘을 열린 상처에 찔러 넣었다.
인류가 지상에 출현한 이래 그 누구도 해보지 않은 시도를 하는 순간이었다. 한 번의 봉합으로 출혈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세 번 봉합하자 출혈은 완전히 멈추었고, 심장의 박동이 강해졌으며, 가빴던 호흡이 잦아들었다. 그는 생리 식염수로 피딱지를 여러 번 세척해서 제거하였고, 소독된 거즈로 말끔히 닦아 낸 다음 피가 새는 곳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흉막을 봉합하고 구부렸던 늑골을 제자리에 돌리고, 배농관을 삽입한 후 절개부위를 봉합하여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환자는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렸고, 관을 통해 많은 농이 배출되었지만, 점차 회복되어 퇴원하였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개월 후 그는 외과학회에서 이렇게 발표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환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는 가벼운 일을 하고 있는데, 아직 제가 그에게 신체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수술 전보다 잘 뛰고 있기 때문에 환자는 건강을 유지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여러분! 심장수술의 적절성에 대한 반대가 있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수술은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심낭에 피가 고여 사망하는 것을 예방했습니다. 본인의 수술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심장 수술 분야가 더 연구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심장봉합술을 통해 이전에는 사망으로 간주되었던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의 심장봉합술 이후 심장은 외과의 불가촉 영역에서 벗어났고 심장병환자들은 죽음의 봉인에서 해제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심장 수술의 기법과 장비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미국 외과의사 존 기번(John Heysham Gibbon 1903-1973)은 안전한 인공심폐기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인공심폐기는 심장이 없이도 장시간 살 수 있게 만든 장치인데 심장 수술에서는 필수적인 장비다. 30년을 매달린 끝에 개발한 인공심폐기로 1952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수술이 3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치가 문제였는지, 수술과정의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1건만 성공하였다. 존 기번은 인공심폐기를 고안하고 개발한 최초의 의사다. 그 후로 인공심폐기가 꾸준히 발전하여 수술실에서 이 기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체외순환사’라는 전문직종이 생겨났다.
한국에서는 1956년 세브란스 병원의 홍필훈 박사가 최초로 개심술을 하였다. 홍 박사는 미국 Baylor의과대학에서 수련받고 1955년 귀국하였는데 한국전쟁 후 열악한 환경에서 여러 차례 동물 실험을 한 후 승모판 협착증으로 죽음을 앞둔 22세 남자를 폐쇄식 승모판 절개술로 수술하였다. 1957년에는 팔로사징증 환아를 수술하였다. 1961년 9월에는 경북대 이성행 교수팀이 저체온법을 이용한 개심술을 처음 집도하였고, 1963년 3월 서울대 이영균 교수는 최초로 인공심폐기를 이용하여 심방중격결손증 수술을 하였다.
심장이식은 196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크리스티안 바나드가 최초로 하였지만, 환자는 폐렴으로 18일 만에 사망하였다. 바나드는 수술 후 무명인에서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의사가 되었다. 그 후로 각국에서 꾸준히 심장 이식수술이 시행되었지만 생존율이 나아지지 않다가 1980년 면역억제제인 사이클로스포린이 개발되면서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1992년 서울 아산병원에서 확장성 심근병증으로 말기 심부전을 앓고 있던 환자에게 처음 시행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900건 이상 이식 수술을 하였다. 생존율은 1년 95%, 5년 86%, 10년 76%로 세계정상 수준이다.
의학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되고 그들 덕에 우리가 산다는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 의학도 많은 분들의 희생, 헌신, 노력이 있어 심장 수술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정상이 되었다. 결코 개혁 대상이 될 정도로 엉망이 아니며 풍파 속에서도 비교적 순항 중이었다. 그런데 ‘의료개혁’이라는 갑자기 나타난 암초에 부딪혀 좌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칼럼니스트 소개
오순영 원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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