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칼럼] 나의 청년기 학창 시절을 감싸준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 에 대하여
[김인호 칼럼] 나의 청년기 학창 시절을 감싸준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 에 대하여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 승인 2024.10.0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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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 Management Society 학회장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 Management Society 학회장

나의 청년기(靑年期)는 1955년 서울중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서울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1965년 서울상대 졸업 때까지가 될 듯 하다. 한마디로 나의 청년기는 나의 학창 시절과 함께 한다.  

1. 사춘기와 함께한 나의 서울중학교 시절 (1955-1958)
6.25 전쟁의 참상을 다 겪으며 6남매를 키운 어머니가 1954년 11월 39세 나이로 돌아가신 지 얼마 뒤 나는 이태원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엄마를 생각하며 울면서 답사를 했는데 그 식장에 모여 있었던 모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졸업에 대한 나의 감성 탓으로 보았는지 대단히 숙연(肅然)했었다. 초등학교 졸업에 이어 1955년 3월 어느날 서울중학교 입학식이 있었는데 그 식에 온 학부모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우리 집에서도 아무도 오질 않았는데 실상은 올만한 사람도 없었다.
서울중학교는 옛 경희궁(慶熙宮)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입학초 학교교정을 비롯한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많은 학교시설들에 대한 생소함과 학생들간의 어색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정도 사라지고 학생들간에 이해와 우정이 싹트면서 남아있던 전쟁 후유증도 점점 치유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헌데 사춘기와 함께한 내 생활에는 큰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형수(兄嫂)를 어머니처럼 따르고 이북(以北)에서 이남(以南)으로 내려와 6.25를 함께 겪고 종전(終戰)후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삼촌, 형의 가출(家出)로 차남이었지만 장남이 된 나, 이태원초등학교 다니는 내 바로밑 여동생,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막내 여동생, 그리고 갓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젓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쌀죽만으로 버티고 있는 막내 남동생 이들을 성동중고등학교 교사인 젊은 홀애비가 어찌 돌볼 것이며 뒷바라질 할 수 있겠는가? 당시 나는 아버지가 아닌 한 젊은 홀애비로서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나는 이런 연민의 정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이런 연민의 정을 일으키는 한 컷의 스냅(snap)사진을 나는 방안 한구석에서 보았는데, 남대문 옆 무역협회 건물 앞을 두 어린 딸을 양손에 잡고 걸어가던 젊은 홀애비의 축 늘어진 어깨를 담고 있는 스냅사진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느날 피난통에서도 메리야스 장사로 큰 돈을 번 대전에 계신 외할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대전갔던 아버지가 웬 여자와 함께 집으로 왔다. 난 직감적으로 그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새 엄마를 천거(薦擧)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새 엄마가 오신 후 어느 날 밤, 난 사춘기 탓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도저히 내 필력으로는 내보일 수 없는 태고적 고요가 내려앉은 듯한 깊은 쓸쓸함 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내가 보았다. 실상인지 허상인지 내 가슴 한 가운데가 원통으로 뻥뚫려 있고 그 통로로 싸늘하고 을씨년스런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던 밤이었다. 나의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새 엄마는 착하고 좋은 분이라는 걸 난 곧 알아 볼 수 있었다. 어느 여자가 다른 여자가 난 아이 넷을 데리고 살 것인가? 이것만 봐도 새 엄마는 절대로 나쁜 여자일 수가 없었다. 흔히 계모(繼母)라는 이름으로 전달되어오는 통념과는 아주 다른 면이 새 엄마에게는 있다고 느껴졌다. 이런 나의 느낌이 전달되었던지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주는 느낌이 새 엄마로부터 전달되어 오곤 했다. 그런데도 이와는 무관하게 나는 여전히 깊은 쓸쓸함속에 있는 그대로였고 웃고 있을 때조차도 그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학교 생활에서 돌파구를 찾아 보고자 했던 것 같았다. 당시 우리 반 애들 대부분이 이북에서 온 애들이었고, 초등학교에서 모두가 우등상을 받은 애들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생활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나에게 비쳐지는 의구심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등상을 받은 애들 간에 점차 우열(優劣)이 생기는 현상이었다. 당연히 열심히 집중해서 공부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처지의 결과가 서로 달라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면서도 이 의구심은 떠나지 않았다. 이런 의구심에 빠져 있을 때 파레토 룰(Pareto’s rule)이라는 걸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개미집단을 연구해 보니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일을 않더라는 것이다. 또 일을 않는 80%의 집단을 분리시켜보니 그 중에서 20%는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이다.
이 파레토 룰이 나의 의구심을 풀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계속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는 개미가 ‘똑같은 걸 계속 반복하는 행동 패턴을 갖고 있을 뿐’ 으로 비쳐졌다. 다시 말해 이 질서는 존재의 시발 때부터 주어진 그대로 오늘날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식으로 대를 이어가고, 화산조(火山鳥)는 폭발한 뜨거운 화산재 속에 재빨리 알을 낳으면 거기서 부화하고 성장하는 식으로 대를 이어가고, 까치가 비도 새지 않는 기막힌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는 방식을 대를 이어가듯이, 그들은 항상 일점 일획의 어김도 없이 마치 로봇처럼 행동하는 걸 알게 되자, 파레토 룰이 인간간의 우열과 이후 지속되는 우열의 패턴을 이해⸱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로 올라가면서 학생들 간의 우열의 차이(差異)는 더 커질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 우열 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질서를 접하게 되었다. 즉,

1.0*1.0*........365번 곱하면 결과는 1.0      
0.9*0.9*........365번 곱하면 결과는 0.03
1.01*1.01*...................365번 곱하면 37.8

출발시의 조그마한 차이가 일년이 지나면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차이를 내보이는 사실을 보여 주는 수리(數理)적 논리다. 즉,
(1) 출발시부터 일년 내내 동일한 행동만을 하는 경우는 첫 출발선 위에 그대로 있는 경우이고,   
(2) 출발시부터 일년 내내 0.1만큼씩 덜하는 행동만 하는 경우는 쪽박 차는 경우이고,
(3) 출발시부터 일년 내내 0.1만큼씩 더하는 행동만 하는 경우는 대박 치는 경우이다. 라는 메시지를 깨닫게 해 준다.
출발시에 학생들간의 조그마한 행보상의 차이가 지속되면 될수록 점점 더 커지거나 점점 더 작아지는 질서, 소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질서가 이 세상에 엄존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메시지다.

내가 중학생이긴 하지만, 이북(以北)에서 월남(越南)-한국전쟁 발발(勃發)-6.25 피난민 생활-1.4후퇴 피난민 생활에서 체득한 다양한 나의 소년기(少年期)의 경험들을 통해서, 인간은 하라는 대로 하는 로봇이 아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모든 일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invisible hand)’ 이 작동하고 있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6.25 피난길에서 접했던 일련의 일들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설사하는 바람에 피난민 대열에서 벗어나 하루 온 종일 돌고 돌다 늦은 밤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엉뚱한 곳에서 초등학교 같은 반 학생을 만났고, 그곳에서 하행열차로 단숨에 대전엘 갔고 대전에서 호남행 열차를 포기하자 단숨에 부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절묘하게 대통령 경호원인 내친구 아버지를 만났고 그 분이 준 돈으로 피난 중에 집을 장만했고 이렇게 이어지는 도미노(domino) 같은 일련의 일들이 과연 우연일 수가 있을까? 아니 세상에 우연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2. 나의 고등학교 시절 (1958-1961) 세 번 정학(停學)당하고 월말모의고사에서 일등하다
고등학교를 시작하면서 친구의 남동생을 가끔 돌봐주는 가정교사로 나의 고등학교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친구의 고향은 내 고향과 같은 평북 정주였고 공교롭게도 그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와 같은 고향과 같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약학대학(藥學大學)을 졸업한 동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뇌졸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포목점포를 운영하며 부유하게 가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얼마후 그의 아버지가 뇌졸로 세상을 떠난 뒤 장남인 내 친구의 성질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고, 기고만장(氣高萬丈)이었다. 내가 이북에서 유치원에 가기 전부터 할아버지가 지나치게 편애하자 내가 기고만장하게 되었듯이.    
고향도 같고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격형성의 집안 분위기도 유사하였기에 나와 그 친구는 마치 짝짝꿍이 같았다. 내가 좀 더 컸으므로 나는 그를 아우처럼 대하곤 했다.
고1 일 때 어느 날 같은 학년 전학생들이 운동장에 집결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헐레벌떡거리며 나에게 와 누가 자기를 때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함께 가서 ‘왜, 얘를 때리려 하냐? 하지마!’ 하는데 ‘넌 뭐야?’ 하길래, 운동장의 모든 학생들이 보는 데서 한방 먹이고, 첫번째 정학을 당했다.
당시 매월 모의고사를 치루며 우수 학생에게 조회 때 시상(施賞)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매번 5, 6명정도가 상을 받곤 하였는데, 어느 달인지는 몰라도 첫번째 정학당하는 와중에서 전교 모의고사에서 나 혼자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든 첫 번째가 힘들지 그 다음 부터는 쉽다는 범죄자의 말대로 한번 정학을 먹고난 다음 두번째는 훨씬 쉬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는 집가는 방향이 같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성공회관과 수녀원이 있는 공원(지금의 서울시의회가 있는 곳) 벤취(bench)에서 쉬고 있었는데, 타교생(아마 배제교 학생)들이 서울고가 어쩌구.....  하며 시비를 거는 걸 한방 날리고 어느 담벽을 뛰어 넘어 도망갔는데 그곳이 바로 성공회 수녀원이었다. 수녀들이 서울고 복장을 알아보고는 나를 숨겨 주었지만 결국 학교에서 아는 바람에 두번째 정학을 당했다.
  
두 번째 정학을 당하고 난 후 어느날 밤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임종의 마 지막 순간에 가까스로 겨우 뜬 눈으로 내게 말해주던 ‘넌 공부해야 해!’ 하던 말씀이 생생하게 내 귀에 들렸다. 그때부터 난 자숙(自肅)하기 시작했고 내가 얻어맞더라도 절대로 폭력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이러한 나의 다짐은 효력을 발하며 순항(順航)하고 있었다. 적어도 고3 여름 방학 전까지는. 고3 여름 방학 하던 날 (당시엔 이날부터 대입 특강이 시작되었음) 고3 다른 반에 있는 애가 오더니 흥분해 가지고 댓자곳자 싸우자는 것이었다. 왜 싸우자고 하느냐 물으니, ‘잔소리하지 말고 방과후 남아서 한판 뜨자.’ 는 것이었다. 난 지금도 그애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
고3이 되면서 단단히 다짐을 했는데 그냥 싸우자는 그의 안달에 나도 열이 몹시 올라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자는 대로 방과 후 우린 한판 붙었다. 시작하자 마자 내 오른발로 그의 얼굴을 차버렸다. 그러자 그가 멀리 나가 떨어졌고 난 내 발 등에서 우찌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나가 떨어진 그를 쫒아가 더 패려니 그가 잘못했다며 얼른 사과하면서 우리의 싸움은 끝났다.
그런데 다음날 큰 문제가 터졌다. 국가 고위공직자인 그 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교장실에 찾아와 호되게 항의하며 우리애 얼굴을 어떻게 이렇게 망가뜨릴 수가 있냐며 교장을 엄히 꾸짖고 있었다. 물론 나도 교장실로 끌려가 있었다. 당장 퇴학시키라며 야단 법석부리는 과정을 거쳐 나에게 50일간의 무기정학이 내려졌다. 그 기간은 대입준비를 해야하는 수험생에게는 치명적인 기간이었다.
  
50일간 나의 선택과목과 영어 수학 국어 시험문제들을 꼬박꼬박 교실마다 돌며 챙겨다 주던 동기생 이문남(지금은 단국대 수학전공 명예교수)의 수고에 대해 난 지금도 감사해 하고 있다. 당시 그는 다른 애들보다 나와 친분이 더 두터웠던 것도 아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본인에게 그 사실을 얘기했더니 그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만 그의 수고로 나는 서울상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드디어 대학입시 원서를 쓰는 날, 무기정학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 성적이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 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 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 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 고 항변하자 나의 선택 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 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나 때문에 무척 애를 태우셨던 선생님이시었다.
서울대 입시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 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그 전  (前)해 뿐만아니라 그 다음 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는데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상대 입시시험 합걱자를 발표하는 날 난 약간 긴장된 상태로 홍능에 있는 상과 대학에 가서 합격자 명단이 실린 대학신문을 사서 내 지원학과인 경제학과를 보니 내 이름이 없었다. 순간 맥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약간 시간이 지나 합격자 명단이 중앙건물 벽에 붙자 사람들이 우 몰려가 합격여부를 재확인하고 있었다. 나도 가서 난 떨어졌는데 서울고에서 누가 붙었느지를 보다 보니 내가 지원하지 않은 상학과에 내 이름이 있었다. 비록 내가 지원한 과는 아니지만 서울상대 합격했음을 확인하고 다른 합격자들과 담배를 피우며 나오는데 눈에 익숙한 한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에 익은 얼굴인데 자세히 보니 아버지였다. 그곳에 아버지가 나타나리라, 고는 난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전공이 경제학에서 상학으로 바뀐 것도 또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길’ 로 내게 다가왔다.          

3. 서울상과대학 시절 (1961-1965)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의 이기붕 부통령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 혁명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난리가 난 상태에서 1961년 3월에 난 서울상대에 입학했다. 나의 대학생활을 떠 올리려니 대뜸 입학 환영 축제에서 나하고 친구가 되고 싶다며 접근해 온 재수(再修)생 배제고 출신인 이x섭이 떠오른다. 순박하고 가식이 없어 보이는 그 친구에게서는 늘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졌다. 나에게도 어린 나이에 엄마의 요절로 말미암아 이x섭이와 유사한 면이 생겼다고 스스로 느껴지면서 우리는 단짝이 되어 늘 붙어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그에게는 이복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그의 아버지인 계부(繼父)는 서울 모지역의 경찰서장(警察署長)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6.25 때 충북 어느 경찰서의 신참 경찰일 때 자기상사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 상사가 돌연사하자 상사부인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가 이복동생이란다. 단짝친구의 친부(親父)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곧장 신참경찰과 결혼하여 이복 동생을 보았고. 나의 단짝 친구는 친부가 갑자기 죽자 그에게는 계부가 생겼고, 그래서 그는 계부와 어머니와 이복동생과 함께 산다고 했다. 어느 날 자기 집으로 날 데려가서 그의 나무책상을 보여주었는데 책상의 웃면은 송곳으로 마구 찔래서 생긴 무수히 많은 구멍들이 알 수도 없는 포스트 모던이즘(post- modernism)의 미술품을 연상시키는 듯 했다.

대학 2년차 어느날 내 단짝 친구가 헐렁한 모자를 쓰고 나타나서는 모자를 벗으며 친모(親母)가 자고 있는 자기 머리카락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놀랐고 황당했다. 그간의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짓을 그의 친모(親母)가 저지른 것이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추적을 해보니 계부에게 여자가 생겼고 그 상황에서 대학생 아들이 현재 남편에 대해 큰 부담을 준다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친아들에 대한 연민과 가련함과 회한이 뒤범벅이가 되어 저지른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늘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의 진원지도 뚜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그에 대한 나의 우정은 서서히 연민으로 바뀌면서 나는 더 많은 시간을 그와 같이 했고 그 걸 보고는 우리 둘을 다같이 서울고 출신인 것으로 볼 정도였다.

청년기(靑年期)인 대학시절에는 남녀간 대학생들의 미팅이 자연스러웠으므로, 서울고-서울상대와 이화여고-이화여대로 구성된 팀을 만들어 상대 홍능제에 참여하여 심기일전(心機一轉)하는 계기를 가질 수가 있었다. 이때 이X섭은 서울고 남자팀원으로 같이 참여했고 이때 남자 대표는 내가 여자대표는 이지적이고 예쁜 한 이화여대생이 맡았다. 같이 일 하면서 서로 눈이 맞았던 탓인지 나와 그녀는 자연스레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우리가 만날 일시와 장소를 정하는 자리에 내 친구 이X섭도 같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만날 날에 설레임으로 차서 그 장소에 나갔더니 이X섭 친구가 와있어서 다소 당황하였으나 내색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들어오다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걸 보고 나처럼 다소 당황하는 듯하더니만 그냥 가볍게 웃으며 자리를 같이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어색한 시간을 보냈고 다음 약속을 정하고 다방을 나와나는 혜화동에 있는 그녀의 집에까지 데려다 주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그 친구도 따라 왔다.

나는 그가 알아서 기길 바랬고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버스가 오자 우리는 올라탓고 그는 버스가 떠나는 걸 보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자 그녀는 자기 집까지 갈 필요가 없다, 며 나에게 심하게 항의하였다. - 이게 뭐예요? 내가 1:2로 데이트 하는 거 아니 쟎아요? - 그러면서 “오늘 나를 만나려 간다니까 자기 엄마가 은빛 나는 큰 열쇠를 자기 옷에 꽂아 주더라며” 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화에 나는 몹시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솔직히 그때까지 난 한번도 진지하게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나 그리고 외로움의 심연 속에 빠져 있는 나의 친구 이X섭. 대학시절의 나의 사랑의 스토리는 단순했지만 나의 그 친구로 인해 애절했었던 것으로 반추(反芻)되곤 한다.                  

한편 나의 대학시절(1961-1965)의 시대 상황은 1961년 5월 군사혁명으로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기틀은 마련되어가고 있었으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좌파학생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서울상대가 그 중심이 되고 있었다. 당시 그런 부류의 선배하나가 나에게 그네들의 서클에 입회하기를 질기게 종용했었다. 그는 대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3년 선배였는데 Karl Marx-Das Kapital 을 몇 번을 읽었다며 떠들어대곤 했었는데, 국회의원을 한번하고는 요절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은 족히 좌파 선두주자의 하나쯤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세대의 대학생활은 당시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 덕(?)에 그저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 라는 자조적 냉소가 만연하는 가운데 4년을 허송(虛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허송의 시기를 끝내고 서울상대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국방의무부터 우선 충실히 하고자 1965년 3월에 나는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 끝 -

그후 공군 장교시절과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 시절과 한양대 교수 시절의 행보는 아래 두 동영상(대한민국 산업화와 Dynamic Management; PAX Koreana)으로 가름하고자 합니다. 

공군 장교시절과 군 복무 후 나의 연구 및 교수 시절의 행보
  
I.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와 세계관에 눈뜨기 시작한 공군장교 시절             (1965-1969)

   1965년 7월 공군소위 임관으로 시작한 나의 군대생할은 단지 국방의무를 다하려는데만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공군경영시스템에 이식된 미국의 공군경영시스템을 통해 나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세계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II. KIST를 비롯한 정부출연 종합 및 전문연구기관 연구시절(1969-1981)과 한양대 교수 시절 (1981-2008)과 정년 명예교수시절 (2008-now)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 구축 및 확산
-  Chaebol Structure: Emergence and Evolution (Wiley Encyclopedia of Management. 3rded. 2015) 
-  Dynamic Management View (TASM, SSCI. 2017)
-  Direct Causal Mechanism of Profit Theory (TASM, SSCI. 2018)
-  Bussiness Model Schema (TASM, SSCI. 2019)
-  Comprehensive Unified Paradigm (TASM, SSCI. 2021)
-  Firm Power Theory based on power concept in social physics,
    (volume*density)*(acceleration)*(velocity)
   ((firm size*(solutions fit, process fit)*(innovation)*(growth vector)) 
-  Needs Evolution Theory as coevolution between purchasing power and technological power
-  WTP(willingness to pay) Quantitative Model
 

(대한민국 산업화와 Dynamic Management)

(PAX Kore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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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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