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익히며 사용해오고 있는 한글, 마치 공기나 물처럼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의 고마움을 혹여나 잊고 지내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와 관련한 영화가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감독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참상을 제3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던 영화 ‘택시운전사’의 엄유나다. 그래서 더욱 기대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아픔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민중들은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말과 글을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으며, 이를 어길 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창씨개명도 이뤄져 우리식 이름이 아닌 일본식 이름으로 아무개를 부르고 불려야 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노릇인가.
언어와 글은 일종의 혼과 정신이다. 한글에는 마땅히 조선의 혼과 정신이 담겨있다, 이를 사용하지 못함은 결국 조선인의 혼이 아닌 일본인의 혼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와 진배없다. 일본의 노림수 역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현실을 너무도 가슴 아파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던 학자 등 지식인이었다.
류정환(윤계상)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은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든 살려내야 우리의 정신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 전국에 걸쳐 흩어져 있는 방언들을 수집하고 이를 추려 우리말대사전을 발간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그 과정은 혹독했다. 일제가 이들을 가만히 둘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한편 김판수(유해진)는 좀도둑이나 소매치기 행태를 일삼으며 수차례 감방을 드나들었던 이른바 건달이다. 그가 우연찮은 기회에 조선어학회에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으나, 처음부터 그를 탐탁지 않아 하던 회장과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만다.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김판수의 진정성을 헤아리게 된 회장은 자신을 책망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시킨다.
이후 김판수는 조선어학회 운영에 적잖은 도움이 되어준다. 아니 사실 그가 없었다면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서슬 퍼런 압제에 의해 벌써부터 와해되고 지금처럼 우리의 말과 글인 한글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극은 일제의 간섭과 압박이 나날이 심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글과 말을 지키려 했던 그들이 얼마나 모진 폭압 속에서 고초를 겪으며 이를 지켜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울러 단순히 학회 소속 지식인들뿐 아니라 김판수와 같은 민초들의 희생이 그러한 노력에 더해졌기에 우리의 혼과 정신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비교적 차분하게 그리고 묵묵히 그려내고 있다. 진중한 내용을 극화할 땐 지루하고 밋밋해질 수 있기에 자칫 신파와 같은 요소들을 욱여넣는 경우가 많으나 그러다 보면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원래의 메시지가 훼손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다행히 이런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있다. 덕분에 작품이 무척 담백하다.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의 말과 글을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있어 최고의 수훈갑은 누가 뭐라 해도 조선어학회 소속 지식인들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곁에서 이들을 묵묵히 도우며 끝까지 함께한 민초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배우 유해진과 윤계상 두 사람의 만남은 영화 ‘소수의견’에 이어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당시에 이미 호흡을 맞춘 터라 이번 작품에서도 훌륭한 케미를 보여준다. 특히 유해진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연기의 신이라 칭해도 될 만큼 깨알 같은 부분까지 일절 소홀함 없이 완벽한 연기력을 펼친다. 그밖에 조선어학회 지식인과 민초들을 연기한 조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다.
우리가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여전히 한글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건 바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끝까지 한글을 지키려 했던 이들 지식인과 이름 없는 민초들 덕분이다. 이 영화를 통해 새삼 한글 사용의 고마움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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