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영 칼럼] 현대의학의 영웅과 위대한 발견 1
[오순영 칼럼] 현대의학의 영웅과 위대한 발견 1
  • 오순영 가정의학과 전문의
    오순영 가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24.08.30 09: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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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흔히 잊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특권’이 하나 있는데 과거인에 비해 현대 의학의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코로나 판데믹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으며, 헌법에 명시된 인간 자연권마저 박탈당하고 억압받았지만, 그래도 과거인이 천연두, 콜레라, 흑사병, 매독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끔찍하게 죽어갔던 것에 비하면 현대인은 과거인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의학의 특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과거의 전염병 시대에는 언제나 국민들이 의사를 불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허무맹랑한 치료제들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으로부터 최대한 돈을 갈취하려는 사기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21세기에 닥친 코로나 판데믹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르지 않았다. 불필요한데다가 오히려 환자와 사회에 해가되는 부당하고, 모순되며, 비합리적인 일들이 매일 벌어졌다. 이 때문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과거인처럼, 현대의학의 특혜를 누리고 살면서도 현대의학을 불신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어떤 환자는 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꺼내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고 따지도 한다.

의대생 증원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정부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는 의학의 깊이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원인이 아닐까? 단순히 의사 숫자를 늘리는 것은 의학이라는 실천적인 학문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의학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현대의학은 수많은 사람의 죽음과 숱한 시행착오, 피와 땀으로 얻어진 값진 것이다. 특히 새롭고 혁신적인 철학, 사상, 그리고 기술과 과학 문물들이 마치 물밀 듯 세상에 등장하던 시대였던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 의학사에 빛나는 선각자와 위대한 발견들을 살펴보면 현대 의학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조금은 해소될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 위키피디아 자료사진

1.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현대의학사에 입문을 할 때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제멜바이스이다. 필자는 그를 현대의학의 문을 연 사람, 혹은 죽음의 손을 삶의 손으로 바꾼 사람이라 부른다.

제멜바이스는 헝가리 태생의 산부인과 의사로 오스트리아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산모들을 돌보았다. 산부인과병동은 1병동과 2병동이 있었다. 비엔나 종합병원은 18세기 중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꿈꾸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황제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산부인과 병동, 정신과 병동, 소아병동도 있었다고 한다. 당대의 명망 있는 의사들이 모여 환자를 돌보았다.

산부인과 병동에서는 많은 산모들이 산욕열로 사망하였는데 의사와 의대생이 담당했던 1병동이 산파들이 담당했던 2병동보다 산욕열로 사망하는 산모가 더 많았다. 그 원인을 단순히 남자들인 의사와 의대생이 여성인 산파들보다 산모를 덜 섬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1병동은 사체를 해부하고 검시하던 해부실과 가까이 있었다. 해부실은 사체에서 나오는 각종분비물, 피, 사체의 조각, 내장 등이 널려 있었고 지독한 냄새가 났다. 당시에는 위생에 대한 관념이 생기기 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눈의 한계를 믿지 않는 시대였다. 시체를 해부하던 손으로 진통이 오는 산모를 진찰하고 아이를 받았다. 1병동의 산욕열 사망환자는 무려 근 20%에 달했다.

그러던 중에 제멜바이스의 절친한 동료인 콜레치카가 해부실에서 시체를 해부하다가 실수로 칼에 손이 베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손가락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전신에 열이 나더니 혼수상태에 빠져 3일 만에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콜레치카는 자신이 그렇게 많은 사체를 해부하던 부검대에 자신이 눕게 되리라는 것을, 제멜바이스는 절친 콜레치카를 자신이 부검하게 될 것임을 결코 몰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우연한 사건은 제멜바이스와 앞으로 임신하여 아기를 낳게 될 모든 여성들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의 상태와 콜레치카의 상태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콜레치카는 손부터 시작하여 팔과 폐까지 고름으로 차있었고 폐부종, 폐렴, 늑막염의 소견이 있었으며 한쪽 눈이 튀어 나와 있었다. 혈관은 염증으로 막혀있었고 거의 모든 장기가 종기로 뒤덮여 있었다.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는 자궁부터 곤죽이 된 것처럼 부패되어 있었고 거의 모든 장기에 염증이 퍼져 있었고 혈관이 막혀있었으며 내부의 팽창으로 눈두덩이 부어 있었고 눈알이 빠져 있기도 하였다.

제멜바이스는 절친의 죽음으로 비로소 왜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체에 있던 어떤 치명적인 물질이 손에 묻게 되는데 그 손으로 산모를 진찰할 때 그 물질이 산모의 몸속으로 들어가 산모에게 염증을 일으켜 죽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산모가 산욕열로 죽은 것은 나쁜 공기나, 우주의 흐름, 어두운 기운, 산모의 약한 체력, 신앙의 부족, 덜 섬세함 때문이 아니라 의사의 더러운 손 때문이라는 것, 그동안 자신과 동료 의사들 그리고 의대생들이 산모를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손 씻기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847년 5월 초부터 산부인과 제1병동 입구의 세면대 앞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졌다.

“오늘부터 부검실에서 나오는 모든 의사나 학생은 산부인과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놓인 세면대에서 손을 제대로 씻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규칙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I. P. 제멜바이스 “

손 씻기를 하기직전 1847년 4월 기준으로 산욕열로 인한 산모의 사망률은 18.27% 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 씻기가 도입된 5월에는 사망률이 12.24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감염이 가장 많이 있는 여름철인 6월에는 2.2퍼센트, 7월에는 1.2퍼센트, 8월에는 1.9퍼센트까지 사망률이 떨어졌다. 처음으로 제2병동보다 제1병동에서 출산 중 사망한 여성의 숫자가 적어진 것이다.

그런데 다시 10월에 환자 12명 중 11명이 같은 병실에서 사망했다. 제멜바이스는 곧바로 하나의 요인을 의심했다. 병실 첫 번째 침대에 자궁암에 걸린 환자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1847년에는 암 치료가 불가능했으므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치명적인 상피성 암은 만성적으로 감염을 야기했다. 당시 환자들이 줄지어 누워 있는 침대를 따라 병동으로 들어온 의사와 학생들은 일단 첫 번째 침대의 자궁암 환자를 먼저 진찰하고 그 손으로 다음번 침대의 환자를 진찰 한 것이었다.

제멜바이스는 해결책을 찾아냈지만, 그것은 당시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부인과 검사를 마친 후 매번 새로운 환자와 접촉하기 전에 염화석회 용액으로 손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그 지시에 대한 저항은 격렬했고 산부인과 과장인 클라인 교수는 자신의 제자이자 조수였던 제멜바이스에 대한 미움을 더욱 키워나갔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이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광신적 열의로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덕분에 염화석회 용액에 담근 의사와 의대생들의 손은 항상 벌겋게 달아오르고 쓰리고 가려운 상태였다. 그만큼 그의 인기도 바닥을 치게 되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1848년 3월과 연이어 8월에 그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몇 달 동안 산욕열로 사망한 환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클라인이 보기에 제멜바이스는 '급진적 이론으로 기존 체계를 완전히 뒤집고 유명해지기 위해 사고를 치고 다니는 풋내기'였고, 이에 둘은 지속적으로 충돌하다 결국 클라인은 제멜바이스의 재계약을 거절하였다.

제멜바이스 역시 이 주제를 담아 책을 출판하여 만회를 시도하였지만, 몇 차례 부정적인 비평을 받았다. 제멜바이스는 이에 반발하며 비판자들을 맹렬히 비난했고,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을 "암살자들"이라고 불렀다.

제멜바이스는 고향인 헝가리로 돌아와 부다페스트에 있는 스젠트 로쿠스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무보수로 명예의사 일을 했다. 그 병원과 제멜바이스가 나중에 교수로 부임한 페스트 대학의 산부인과 병원은 그와 인연이 닿기 전 산욕열이 창궐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료들이 인정하지 않자, 그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마침내 그의 행동은 균형을 잃었고, 결국 1861년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그에게 새로운 병원에 가보자고 설득했고, 그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후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 채고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들이 그를 심하게 폭행했다. 그리고는 구속복을 입히고 어두운 방에 그를 가뒀다. 그로부터 2주 후 아이러니하게도 제멜바이스는 오른손에 난 상처에서 시작된, 자신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제멜바이스는 아무도 손 씻기를 하지 않던 시대를 모든 사람이 손 씻기를 하는 시대로 만든 장본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자신의 확신을 반대자들에게 거칠게 몰아붙인 점이다. 조금 유연하게 했다면 해피엔드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칼럼니스트 소개

오순영 원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코로나진실규명의사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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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우 2024-09-03 06:24:11 (211.235.***.***)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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