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복 칼럼] 윤석열 정부의 김경수 복권에 관하여
5년 임기 중 3년 차에 들어와 있는 윤석열(尹錫悅) 정부의 국정 운영이 상식적인 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한두 건이 아니지만 이번에 전임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의 정치적 총아(寵兒)였던 김경수(金慶洙) 전 경남지사의 ‘복권(復權)’ 문제를 둘러싸고 용산(龍山)의 대통령실과 명색이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불협화의 소음은 정말 양심적인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서 김경수의 복권 문제가 무엇 때문에 표출되는 것인지 우리는 진심으로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감형(減刑)’과 함께 ‘복권’은 이 나라 행형(行刑) 제도에서 3권분립 제도가 파생시킨 ‘딸꾹질’의 하나로 아무리 좋게 보아도 '필요악'의 하나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감형'이나 '복권'은 법정의 판결에 의하여 복역 중에 있거나 또는 감형 이후에도 신분에 대한 법적 제재가 지속되고 있는 벙법자들의 행형 성적, 즉 '개전(改悛) 에부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형기를 단축시키거나 신분상의 제약을 풀어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3권분립 제도에 반하는 예외적 조치로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 같은 예외적인 '은전'의 혜택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당사자가 그에게 가해진 법적 제재의 정당성을 수용하여 반성하고 회개하는 개전(改悛)의 정(情)이 인정되어야 할 뿐 아니라 “법 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 사람 없다”는 만민평등(萬民平等) 원칙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김경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김경수는 선거 부정 사범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저촉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감형’의 혜택을 수혜했지만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시인하고 이에 대핸 개전의 정을 보여준 사실이 없는 자이다. 더구나, 지금 자신의 ‘복권’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도, 보도에 의하면, 김경수 자신은 정부가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진 ‘복권’의 사유를 수용할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역대 정권이 '사면'이나 '복권' 카드를 꺼내 들 때마다 등장했던 명분이 '국민통합'이었고 요즘 보도를 보면 이번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용산 정권의 들떨어진 주인공들은 김경수가 '복권'되면 진정 '국민통합'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이 정권은 당장 보따리를 싸가지고 용산을 떠나는 것이 옳다. '복권'된 김경수는 이재명과 야합ㆍ제휴하거나 아니면 이재명과 피가 터지는 '선명성' 경쟁을 벌림으로서 용산 정권의 조기 퇴진을 강요하는 '촛불' 투쟁에 전력 투구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소위 ‘법’과 ‘정의’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인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유두분면(乳頭粉面)이었던 것은 아니었는가라는 국민적 의혹에 대해 용산 쪽에서는 가타부타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보도에 의하면, 용산 쪽에서 이 시점에 김경수의 ‘복권’을 고려하는 것은 <더불어민주당>을 소도리하고 있는 이재명(李在明)에 대한 견제마(牽制馬)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왕설래(說往說來)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무슨 소린인가 싶다.
결국 이 정부도 문제의 ‘복권’을 대야 정치 공작 판의 장기 쪽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ㆍ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라는 옛말이 한치도 그른 것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김경수 ‘복권’ 문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천지당만지당(千至當萬至當)인 것 같다.
이동복(李東馥)의 Bio-sketch
193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풀브라이트 단기 장학생으로 미국 〈인디아나 주립대〉 신문학과에서 신문학을 연수(1964-1965)했으며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4기; 1976)과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1 기; 1988-1989)을 이수했다.
1958년 대학 재학 중 〈한국일보〉 견습기자(8기)로 입사하여 정치부기자로 일했으며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시작에 즈음하여 정부로 옮겨서 남북회담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작성에 참가하고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대변인 일을 시작했다. 〈중앙정보부〉 국가심리전총국장(1977-1979)ㆍ부장특별보좌관(1979), 〈국토통일원〉 남북회담 사무국장(1980-1982) 직을 수행한 뒤 〈삼성 그룹〉으로 옮겨서 회장고문(1982)ㆍ〈삼성정밀공업(주)〉(1982-1988)/〈삼성항공산업(주)〉 대표이사 부사장(1982-1988)으로 일했다.
국회의장 비서실장(1988-1990)으로 일한 뒤 남북회담에 복귀(1991-1993)하여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대변인 및 〈정치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분야별 <부속합의서>들 및 분야별 <남북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들과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을 타결시킨 협상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통일연구원〉〈(1993-1994)과 미국 워싱턴 소재 〈조지 워싱턴 대학교 개스턴 시거 동북아 문제 연구소〉(1994-1995),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1995-1996)에서 초청 연구원 생활을 하고 제15대 국회의원(1996-2000: 〈자유민주연합〉•전국구)과 〈명지대학교〉 초빙교수(2000-2004)로 근무한 뒤 지금은 NGO 단체인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와 서울 소재 안보-통일정책 씽크탱크인 〈신아시아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그리고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상임고문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보국훈장 천수장》, 《홍조 근정훈장》, 《황조 근정훈장》을 받았고 저서로는 《Remembering and Forgetting: The Legacy of War and Peace in East Asia》 (공저) (Wasington, D.C., CSIS, 1996), 《이동복의 미로 찾기: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 1ㆍ2권 (서울; 도서출판 삶과 꿈, 1999)과 《한국 현대사 이해》(공저) (서울; 경덕출판사, 2007),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서울; 경덕출판사, 2007)및 《대한민국 정체성 시리즈 : 한미동맹》(서울; 백 년 동안, 2015)과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