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가 머무는 시간(8) 더 큰 불행이 있다
1미터 길이의 직선에 손을 대지 않고 그 직선을 짧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의 답은, 그 직선보다 긴 직선을 위나 아래에 그어 놓는 것이란다. 그렇게 하면 원래 있었던 직선이 짧은 직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짧다’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어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더 큰 불행을 생각해 내면 그 불행한 일이 작은 불행이 된다는 뜻의 구절이 <탈무드>에 나온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라는 구절이다.
이것의 예를 이렇게 들 수 있겠다. 십만 원을 잃어버리면 이십만 원을 잃어버린 더 큰 불행을 생각해 내서 그것보다 다행스런 일이라고 여기고, 화재가 나서 집이 타 버리면 인명 피해가 있는 더 큰 불행을 생각해 내서 그것보다 다행스런 일이라고 여기며 위안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가정보다 차라리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남을 보고 위안을 받을 때가 더 많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전셋집에서 사는 사람이 월세를 내며 사는 친구를 보고 위안을 받는 경우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불행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로 권여선 작, ‘사랑을 믿다’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남자와 이별하고 실연의 고통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한 젊은 여성이 어머니 심부름으로 큰고모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거기서 우연히 불행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그 여성의 큰고모님 집을 철학관으로 잘못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는 친지의 희귀병 때문에, 누구는 유괴된 손자 때문에, 누구는 바람난 남편 때문에 절실한 마음으로 점을 보러 철학관을 찾아왔던 것.
그들의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된 그녀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건만 그들의 딱한 사정에 마음이 강하게 끌리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큰고모님 집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타인을 위해 빌었다. “희귀병을 앓는 친지의 완쾌를, 유괴된 손자의 생사를, 바람난 남편의 귀가를, 자식을 앞세운 뒤 늙어가는 부부의 평안과 명랑을 빌었다. 그녀가 타인을 위해 뭔가를 이토록 절박하게 빌어본 적은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녀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권여선 작, ‘사랑을 믿다’ 중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는 것은 이제 남자와의 이별로 신음하던 그녀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 집을 방문하기 전과 방문한 후의 그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자신의 지독한 아픔도 싹 잊은 채 오직 남을 위해 마음속으로 절실히 빈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 따위는 거의 치유되었다는 걸 뜻하리라. 그런 불운한 일들을 겪으며 사는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고통은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이 그녀를 변화시켰으리라.
이 이야기를 통해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므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엄살떨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보고 위안을 받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것. 셋째,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비교가 필수라는 것.
타인과 늘 비교하는 인간 심리로 인해 자신의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아도 부자를 보고 나면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고, 그리 뚱뚱하지 않아도 자신보다 더 날씬한 사람을 보면 자신은 살을 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보다 열위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게 좋다는 결론에 이른다.
행복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뜻으로 솔제니친*은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로 결심하고 있는 한 행복하다. 아무것도 그를 막지 못한다.”
* 솔제니친 :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